사랑이 죄가 될 수 있는가? 기독교 교리 전체는 왜곡된 사랑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인간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부여하신 성품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할 때에 부패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계명의 부모공경 명령조차도 하나님 사랑의 하위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결정에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을 먼저 강조하셨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막 10:2-9).
결혼을 통해 이뤄지는 남녀의 깨뜨릴 수 없는 교제의 관계가 성적 존재로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에 대해 생각할 때에 가져야 할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동성애 관습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구약과 신약의 그 어떤 본문에서도 전혀 예외가 없이 그 관습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레위기의 성결법들은 너무나 확고하게 동성애를 거부한다.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동성애는 간음과 마찬가지로 사형에 해당하는 큰 범죄로 인식되었다.
(레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 20: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구약 백성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다른 나라들과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신약에서도 지속된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동성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애적 행위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특징으로 규정한다(1:27).
(롬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에서 동성애적 관습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라고 묘사된다.
(고전 6:9-11)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이 모든 악한 관습들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천명한다(고전 6:11).
신약 성경의 그 어떤 본문도 동성애적 행위들을 거부하는 이러한 바울의 선언들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전체는 동성애 행위를 예외 없이 거부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성경 해석의 결과는 오늘날 교회가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좁은 자리만을 허락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동성애를 별로 안 중요한 주제로 여겨서 우리들이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되는 문제인 것처럼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대한 말씀과 결혼에 대한 말씀들은 창조의 목적과 관련한 중요한 말씀이다. 그런 본문들을 살펴본다면 동성애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알게 된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동성애 문제는 다만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라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경 시대와 다른 관점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증언들은 구약과 신약 모두 이 문제에 있어서 일치하며, 이것이 다만 문화적인 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가르친다.
교회가 동성애를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중요한 인류학적 증거들을 모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인류학적 증거들이란, 동성애 행위는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심신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의 발현으로서, 성적인 행위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몸과 정신에 그런 성향을 갖고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중에 실제 행하는] 동성애적 행위(homosexual practice)와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동성친애적 성향(homophile inclination)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성향이 반드시 그런 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성적인 충동이 다만 성적 행위에만 연관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적 삶에 두루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런 특징은 같은 성을 가진 이들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바로 그렇게, 성적 동기들이 인간의 다양한 행위들과 연관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삶의 영역과 행위들에서 성적 동기들이 적절하게 작동하도록 가꿔가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동성친애적 성향이 동성애적 행위로 자동적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동성친애적 성향들은 우리가 동성들을 대할 때 그들을 우리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타자를 섬기는 인간의 소명의 대상으로 여기게끔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헬무트 쉘스키(Helmut Schelsky)가 제도화된 결혼의 가장 큰 성취는 인간의 성이 타자를 위한 봉사를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한 것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동성친애적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그 동성친애적 성향을 잘 다루어서 그들의 행동이 책임성 있고도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돕도록 만들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동성애적 행위들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성적 행위의 표준으로부터의 이탈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는 것이다. 결혼의 목적을 생각해 본다면, 다만 동성애뿐 아니라 특히 간음도 결혼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표준을 떠나 결혼을 망가뜨리는 이러한 행위들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일반적이고 만연한 일들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교회는 살고 있다. 교회는 그런 행위들을 하는 자들을 관용정신과 이해심으로 대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회개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표준이 무엇인가 아는 것과 표준을 떠난 행위(자)들을 대하는 것이 구분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표준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기독교회의 테두리는 성경의 권위에 근거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동성애 문제에서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쳐 주는 표준을 변경시키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교회 분열을 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교회가 동성애 행위를 성경적 표준에서 떠난 것으로 인식하기를 그치고, 동성애적 결합이 결혼과 동등한 사랑의 결합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면, 그런 교회는 성경적 근거를 버린 것이고, 성경의 일치된 증언에 대항하여 서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시도하는 교회가 있다면,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이기를 멈추려고 하는 것이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지음; 마커스 보크뮤얼(Markus Bockmuehl)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 우병훈 한역(축약한 곳도 있고, 의역한 곳도 있음). Copyright: Pannenberg, “Revelation and Homosexual Experience,” Christianity Today (1996.11.11.)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1996/november11/6td035.html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정옥배 옮김; IVP, 2011), 제16장 “동성애”도 참조할 것.
우병훈 교수(2015.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