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서양고전학

신학, 서양고전학, 바울서신, 로마서

로마서에 나타난 디아트리베(Diatribe) — 4월 28, 2015

로마서에 나타난 디아트리베(Diatribe)

“디아트리베”(διατριβή)란 헬라어로 “논리적인 글”(discourse)을 뜻합니다. 바울 서신서에서 “디아트리베”는 가상적 대화 상대자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2:1-11, 2:17-29, 3:1-8, 6:1-14, 9:30-10:4 등에서 디아트리베가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디아트리베를 당시의 철학자들에게서 빌려왔을 가능성이 있지만, 사실상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이 많으며, 회당에서의 논쟁 양식에 맞게 수정해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디아트리베가 사용된 곳은 당시의 유대인들과의 논쟁이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디아트리베”에는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 가상적 대화 상대자의 반론들을 열거하면서 답한다(슈라이너, 142).
  • 가상적 대화 상대자는 주로 단수로서, “너”라고 지칭된다(슈라이너, 142).
  • 바울은 가상적 대화 상대자에 대해 주로 수사학적 질문들을 제기한다(슈라이너, 142).
  • 디아트리베 양식은 진짜로 그러한 적대자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슈라이너, 41).

이상, 토마스 슈라이너, 『BECNT 베이커 신약 성경 주석, 로마서』(배용덕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2)에서 발췌하여 정리함.

우병훈 교수(201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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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와 동성애 경험 —

계시와 동성애 경험

사랑이 죄가 될 수 있는가? 기독교 교리 전체는 왜곡된 사랑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인간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부여하신 성품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할 때에 부패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계명의 부모공경 명령조차도 하나님 사랑의 하위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결정에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을 먼저 강조하셨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10:2-9).

결혼을 통해 이뤄지는 남녀의 깨뜨릴 수 없는 교제의 관계가 성적 존재로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에 대해 생각할 때에 가져야 할 가장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동성애 관습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구약과 신약의 그 어떤 본문에서도 전혀 예외가 없이 그 관습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레위기의 성결법들은 너무나 확고하게 동성애를 거부한다.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동성애는 간음과 마찬가지로 사형에 해당하는 큰 범죄로 인식되었다.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20: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구약 백성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다른 나라들과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신약에서도 지속된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동성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애적 행위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특징으로 규정한다(1:27).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에서 동성애적 관습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라고 묘사된다.

(고전 6:9-11)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이 모든 악한 관습들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천명한다(고전 6:11).

신약 성경의 그 어떤 본문도 동성애적 행위들을 거부하는 이러한 바울의 선언들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전체는 동성애 행위를 예외 없이 거부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성경 해석의 결과는 오늘날 교회가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좁은 자리만을 허락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동성애를 별로 안 중요한 주제로 여겨서 우리들이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되는 문제인 것처럼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대한 말씀과 결혼에 대한 말씀들은 창조의 목적과 관련한 중요한 말씀이다. 그런 본문들을 살펴본다면 동성애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알게 된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동성애 문제는 다만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라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경 시대와 다른 관점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증언들은 구약과 신약 모두 이 문제에 있어서 일치하며, 이것이 다만 문화적인 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가르친다.

교회가 동성애를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중요한 인류학적 증거들을 모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인류학적 증거들이란, 동성애 행위는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심신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의 발현으로서, 성적인 행위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몸과 정신에 그런 성향을 갖고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중에 실제 행하는] 동성애적 행위(homosexual practice)[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동성친애적 성향(homophile inclination)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성향이 반드시 그런 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성적인 충동이 다만 성적 행위에만 연관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적 삶에 두루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런 특징은 같은 성을 가진 이들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바로 그렇게, 성적 동기들이 인간의 다양한 행위들과 연관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삶의 영역과 행위들에서 성적 동기들이 적절하게 작동하도록 가꿔가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동성친애적 성향이 동성애적 행위로 자동적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동성친애적 성향들은 우리가 동성들을 대할 때 그들을 우리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타자를 섬기는 인간의 소명의 대상으로 여기게끔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헬무트 쉘스키(Helmut Schelsky)가 제도화된 결혼의 가장 큰 성취는 인간의 성이 타자를 위한 봉사를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한 것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동성친애적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그 동성친애적 성향을 잘 다루어서 그들의 행동이 책임성 있고도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수행하도록 돕도록 만들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동성애적 행위들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성적 행위의 표준으로부터의 이탈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는 것이다. 결혼의 목적을 생각해 본다면, 다만 동성애뿐 아니라 특히 간음도 결혼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표준을 떠나 결혼을 망가뜨리는 이러한 행위들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일반적이고 만연한 일들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교회는 살고 있다. 교회는 그런 행위들을 하는 자들을 관용정신과 이해심으로 대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회개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표준이 무엇인가 아는 것과 표준을 떠난 행위()들을 대하는 것이 구분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표준 자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기독교회의 테두리는 성경의 권위에 근거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동성애 문제에서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쳐 주는 표준을 변경시키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교회 분열을 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교회가 동성애 행위를 성경적 표준에서 떠난 것으로 인식하기를 그치고, 동성애적 결합이 결혼과 동등한 사랑의 결합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면, 그런 교회는 성경적 근거를 버린 것이고, 성경의 일치된 증언에 대항하여 서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시도하는 교회가 있다면,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이기를 멈추려고 하는 것이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지음; 마커스 보크뮤얼(Markus Bockmuehl)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 우병훈 한역(축약한 곳도 있고, 의역한 곳도 있음). Copyright: Pannenberg, “Revelation and Homosexual Experience,” Christianity Today (1996.11.11.)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1996/november11/6td035.html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정옥배 옮김; IVP, 2011), 제16장 “동성애”도 참조할 것.

우병훈 교수(2015.3.30)

바울 서신에서 파라이네시스(권면) 어구 —

바울 서신에서 파라이네시스(권면) 어구

“파라이네시스”(paraenesis)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권면, 충고”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전통적 도덕이나 종교의 관점에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1: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부분은 파라이네시스(권면) 어구에 속합니다. 이렇게 선한 일과 악한 일을 나열하는 것은 그리스-로마의 도덕철학자들의 글쓰기에도 종종 나옵니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쓰셨던 어법의 영향이 큽니다. 아래 마가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7:20-23)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유대교는 윤리적 단일신론에 근거하여 이런 파라이네시스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도 역시 스토아, 견유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등의 철학 유파들이 파라이네시스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파라이네시스 형식은 주로 아래의 세 가지입니다.

  1. 선한 일과 악한 일의 나열

선한 일의 나열: 고후 6:6-7; 갈 5:22-23; 엡 4:23

악한 일의 나열: 롬 1:29-31, 13:13; 엡 5:3-5; 딤전 6:4-5

선한 일과 악한 일이 함께 나오는 나열: 갈 5:19-23; 엡 4:31-32; 딛 1:7-10

  1. 가정 준칙(Haustafeln)

골 3:18-4:1; 엡 5:21-6:9; 딤전 2:1-6:1; 딛 2:1-10; 벧전 3:1-7

  1. 종결적 파라이네시스

롬 12:1-15:13; 갈 5:1-6:10; 살전 4:1-5:22; 골 3:1-4:6.

이런 부분은 매우 긴데, 이전까지 질문이나 비판이나 신학적 문제를 충분히 다뤘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고 이제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직설법”(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명령법”(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으로의 전환을 보게 됩니다.

* 보통 바울 서신서의 앞부분은 직설법, 뒷부분은 명령법이라고 단순히 구분합니다. 이런 구분은 유용합니다. 하지만 직설법과 명령법의 엄밀한 구분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에서는 섞여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병훈 교수(2015.3.23)

바울 서신서 단락 나누기 —

바울 서신서 단락 나누기

설교를 할 때 한 절씩 풀어가는 방식, 즉 구절별 석의에 근거한 설교(expository sermon)는 단 한 구절도 놓치지 않는 장점은 있지만, 해당 본문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먼저 바울 서신을 단락별로 나누고 그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훈련을 하면 좋습니다.

바울 서신서의 경우 각 단락의 핵심 메시지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한 단락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이렇게 단락의 시작점과 끝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락이 “전환되는 지점”을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서에서 단락의 전환점에서는 아래와 같은 전환 어구들이 나옵니다.

  1.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등의 종결 어구
  2. “형제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등의 호격.
  3.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알기를 원하노니”, “~을 알라”, “우리는 아노니”, “~을 모르느냐?” 등의 알림 어구.
  4. “권면하노니”, “권하노니”, “명령하노니” 등의 권면 어구.
  5. “~에 관하여는”(peri de)라고 시작하는 주제 전환 어구.

이런 지점들은 모두 다 주제가 전환되는 곳들입니다. 이 구절들 앞에서 하나의 단락이 끊어지고, 이 구절들과 함께 새로운 단락이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단락 전환 어구들보다 더 강한 연결점들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1. 같은 단어들이 단락의 앞부분과 끝 부분에 나온다면 하나의 순환 단락(inclusio)을 형성하기 때문에 전체를 한 단락으로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4:1-12에서 1절과 12절에 “행하다”라는 단어가 함께 나오고, 1절과 10절에 “증가시키다”라는 단어가 함께 나오고, 1절과 11절에 “명령하다”라는 단어가 함께 나오므로 12절까지가 한 단락입니다.
  1. 주동사에 걸리는 부정사들이나 분사들이 계속해서 연결될 때에 중간에 끊으면 안 되고 전체를 한 단락으로 봐야 합니다.
  1. 같은 단어나, 어원이나 의미가 유사한 단어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어휘적 일관성”(lexical coherence)이 이뤄지고 있으므로 단락이 계속된다고 봐야 합니다.
  1. 기도문, 송영(doxology), 찬송, 고백문 등은 모두 한 단락입니다.

이렇게 단락을 나누고 설교를 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단락의 구분 없이 한 절씩 설교하는 것의 차이는, 단락의 구분이 분명하면 핵심 메시지 역시 분명하게 잡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단락을 나눈다고 해서 중심 메시지가 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고, 단락을 나누어도 놓치는 구절 없이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긴 본문을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설교해야 하거나, 집중력이 약한 청중들에게 본문의 핵심 메시지만을 강력하게 전달하고자 할 때에는, 이렇게 단락을 나누는 훈련을 하면서 설교 준비를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우병훈 교수(고신대학교; 2015.3.23)

로마서 1장 1-7절 헬라어 구조 분해도 —

로마서 1장 1-7절 헬라어 구조 분해도

로마서 1 1-7절의 구조

  1. 발신자          바울 종 예수 그리스도의 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2. 동격                  [즉]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κλητὸς ἀπόστολος,
  3. 동격 분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구별된 ἀφωρισμένος  εἰς 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
  4. 관계사절                    그것[=복음]은 미리 약속된  ὃ     προεπηγγείλατο
  5. 전치사구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διὰ τῶν προφητῶν αὐτοῦ
  6. 전치사구                           성경에 ἐν γραφαῖς ἁγίαις
  7. 전치사구                        그의 아들에 관하여 περὶ τοῦ υἱοῦ αὐτοῦ,
  8. 1동격분사                       [그 아들은] 나신 분 τοῦ γενομένου
  9. 전치사구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로부터 ἐκ σπέρματος Δαυὶδ κατὰ σάρκα,
  10. 2동격분사                                    능력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신 분 τοῦ ὁρισθέντος υἱοῦ θεοῦ ἐν δυνάμει
  11. 전치사구                                        성결의 영으로는 κατὰ πνεῦμα ἁγιωσύνης
  12. 전치사구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ἐξ ἀναστάσεως νεκρῶν,
  13. 동격 [즉]                             예수 그리스도 우리들의 주님이신 분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14. 관계사절                            그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와 사도직을 받았으니 διʼ οὗ ἐλάβομεν χάριν καὶ ἀποστολὴν
  15. 전치사구                                       믿음의 순종을 향하여   εἰς 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
  16. 전치사구                                       모든 이방인들 안에서    ἐν πᾶσιν τοῖς ἔθνεσιν
  17. 전치사구                                       그의 이름을 위하여      ὑπὲρ τοῦ ὀνόματος αὐτοῦ,
  18. 관계사절                        너희도 역시 그들 안에 있어   ἐν οἷς     ἐστε     καὶ ὑμεῖς
  19. 관형구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부르심 받은 자들 κλητοὶ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20. 수신자                    로마에 있는 자들 모두에게 πᾶσιν     τοῖς οὖσιν     ἐν Ῥώμῃ
  21. 동격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ἀγαπητοῖς θεοῦ,
  22. 동격                        [즉]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는 자들에게 κλητοῖς ἁγίοις·
  23. (동사)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appos apposition; appositive 동격

att attributive genitive (수식하는 소유격) and participle (수식하는 분사)

ptc participle 분사

rel relative clauses 관계사절

cl clause 절

prep preposition 전치사

phr phrase 구문

pred predicate 술어

adj adjective 형용사

( … ) indicates an understood verb or part of speech 동사에 해당하는 부분이나 보충부를 뜻함 [1]

[1] Dean Deppe, The Lexham Clausal Outlines of the Greek New Testament: SBL Edition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1), Ro 1:1–7에서 전체 내용 인용하고 부분적으로 번역함.

우병훈 교수(고신대학교; 2015.3.16)